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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ational Gallery 네번째 이야기 - 17세기의 회화

과천가이 2009. 12. 23. 15:48

역사학자 박지향 교수(서울대)의 말에 의하면 17세기의 영국은 혁명의 시대라고 한다. 16세기의 처녀왕 엘리자베스의 사망이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튜더 왕조에서 새로운 스튜어트 왕조를 열어나갔다. 17세기의 대표적인 일로는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102명의 청교도들(Pilgrim Fathers)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났고, 1649년 의회파와 왕당파의 충돌로 찰스1세가 크롬웰군에 의해 처형당하고, 나중에 크롬웰은 부관참시되고, 1688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왕을 갈아치운 명예혁명이 일어나고, 명예혁명의 뒤끝으로 새로운 통치자와 맺은 계약의 법전화인 권리장전이 제정되고....결국 이러한 토대들은 영국식 의회 민주주의가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물론 과학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일이 영국에서는 있었다 1687년 아이작 뉴턴이 물리학의 Bibke안 "프린키피아"를 출간하였다. 이것이 대충 훑어본  혁명의 시대인 17세기의 영국의 역사이다. 17세기 유럽의 회화에 대해 알아보자.

 

<17세기의 회화(17TH-CENTURY PAINTINGS)>

 

카라바지오, 루벤스, 푸생, 반 다이크, 벨라스케스, 클라우드, 렘브란트, 커이프, 베르메르 

 

일부 예술가들은 영감을 얻기 위해 과거의 회화로 시선을 돌렸지만, 화려함에서부터 간결함에 이르기까지 항상 자신만의 스타일을 회화에 더했습니다. 종교적인 주제의 사용은 관찰자의 감정을 이끌기 위한 새로운 방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네덜란등[서는 정물, 풍경, 또는 우아한 사교계 모임에서부터 선술집의 생생한 장면에 이르는 일상의 모습을 담는 전문 화가들이 매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Caravaggio, Rubens, Poussin, Van Dyck, Velázquez, Claude, Rembrandt, Cuyp, Vermeer 

 

While some artists of this period looked to the art of the past for inspiration, they always imparted their own style, from the flamboyant to the austere. Religious subjects were treated in novel ways to engage the emotions of the viewer. In the Netherlands, specialist painters of still lifes, landscapes and scenes of everyday life – from elegant social gatherings to lively scenes in taverns – enjoyed great popularity.

 

 17세기 회화들이 배치된 방의 위치와 각 방의 주요 그림들은 다음과 같다.

 

   

  

17세기 유럽의 미술은 일종의 예술적 폭발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림의 새로운 중심지가 등장하고, 교회와 귀족이나 왕 일변도였던 후원자에서 새로운 후원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정통 카톨릭에 반발한 칼뱅이즘의 네덜란드 공화국 등은 교회의 후원자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돈 많은 상공인들과 경제적 번영에 의해 대저택을 꾸미려는 사람들의 후원자가 등장한 것이다. 결국 회화의 방향은 많은 풍경화를 낳게 되었다. 17세기 회화를 역시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삼성전자가 후원하는 우리말 가이드와 내셜날 갤러리가 엄선한 하이라이트 30선을 중심으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일단 세인스베리관의 15세기 그림과 그리고 16세기 그림까지 섭렵한 후에 Room 14를 통해 17세기 그림이 놓여있는 북쪽으로 옮겨왔다는 전제하에 그림을 보는 동선을 가장 안쪽부터 보도록 하자. 즉, Room 20 --> Room 24 -->Room 25 -->Room 29 --> Room 30 --> Room 31 --> Room 32 의 순이다. 물론 그 사이의 룸을 보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Room 20>-성 우르술라가 출항하는 항구(Seaport with the Embarkation of Saint Ursula), 1641년 제작, 클로드(Claude, 1604/5?-1682)-우리말 오디오 가이드 없음

   

전설에 따르면 성 우르술라는 기독교인이었고 비기독교인인 영국 왕자의 청온을 받고 그에게 세 가지 조건을 내세운다. 1) 3년 기달릴 것 2) 공주와 구기부인 10명, 그리고 그들을 시중들 각각1000명 즉 총 11.000명의 처녀들 3) 그리고 그들이 탈 배..사실은 무리한 요구였지만(어쩌면 결혼을 피하기 위한) 놀랍게도 아름다운 성 우르술라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이 조건은 받아들여 진다. 이 그림은 그 전설에 바탕을 둔 그림이다. 11,000명의 처녀와 함께 순례 여행을 위해 출항하는 모습이다. 결론은 어떻게 되었을까? 로마의 순례 여행을 마친 이들은 돌아오는 길에 라인강변의 퀼론(Cologne)에 머무르는데 여기에서 기독교도라면 무조건 죽이는 훈족을 만나게 된다. 이들 훈족은 공주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죽이고 공주의 미모에 반한 훈족의 추장은 그들의 규율을 어기고 공주를 죽이지 않고 결혼하자고 조른다. 그러나 공주는 "no, 결국 공주는 이교도인 훈족의 화살에 맞아 순교하게 된다. 이러한 전설에 바탕을 둔 그림이다. 왼쪽의 건물은 로마에 있는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San Pietro in Montorio) 교회를 토대로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클로드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풍경화가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의 광원은 떠오르는 해이다. 이 떠오르는 해는 모든 선들이 모이는 소실점으로 클로도는 빛과 공간의 조화를 이뤄내고 있다.

 

 


 

<Room 24>-34세의 자화상(Self Portrait at the Age of 34), 1640년 제작,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

 

이 그림은 파리 루브루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소위 남자 모나리자로 알려진 라파엘의 '발다사르 카스틸료네의 초상화(Portrait of Baldassare Castiglione, 1514-15년)'와 런던 내셔날 갤러리에 있는 티티안의 '퀼트 소매의 남자(A Man with a Quilted Sleeve, 1510년), 그리고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알브레이트 뒤러의 '자화상(Self Portrait, 1498)'의 그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라파엘의 초상화에는 너무 큰 감동을 받아 모사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렘브란트는 이 초상화에서 16세기의 멋진 의상을 입고 잔신만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마도 렘브란트는 이 초상화를 통해 이전의 쟁쟁한 선배 초상화가의 반열에 자신을 올려 놓으려 했을 것이다. 

 

 

 

 

 

 

 

 

 

 

 

<Room 25>-버지널 앞에 서 있는 젊은 여인(A Young Woman standing at a Virginal), 1670-2년경 제작, 베르메르(Johanness Vermeer, 1632-1675)

  

 화려한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네덜란드의 델프트에서 제작된 검은색과 흰색 무늬가 있는 델프트 파일이 깔려진 방에서 버지널(Virginal)이라는 중세의 건반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왼쪽의 벽면에는 풍경화가 걸려있는데 아마도 이 그림은 네더란드 화가 Jan Wijnants나 혹은 Allart van Evedingen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그 오른쪽에는 카드를 들고 있는 사랑의 큐피드가 마치 사랑의 맹세라도 하듯이 벽에 걸려 있다. 이 그림은  Allart의 동생인 Caesar van Everdingen 작품이다. 이 젊은 여인은 버지널의 덮개에 그려진 그림과 같은 외국을 여행 중일지도 모르는 연인을 그리워하고 있는가보다. 베르메르가 그린 그림은 평생 35편 정도 밖에 안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르메르는 델프트 시내에서 여관과 사무실 운영, 그리고 화상이라는 직업이 있는 화가 였다. 베르메르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일상 생활을 담은 그림들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베르메르는 '버지널 앞에 앉아 있는 젊은 여인(A Young Woman seated at a Virginal)'이라는 그림도 그렸다.

 

 

 

 

 

 

 

<Room 29>-삼손과 들릴라(Samson and Delilah), 1609-10년 제작,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우리말 오디오 가이드 없음

   

유대의 영웅 삼손과 그를 팔아먹은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구약 성서 사사기 16장 16절~21절에 바탕을 둔 것이다. Judges-Chapter 16:19. Having put him to sleep on her lap, she called a man to shave off the seven braids of his hair, and so began to subdue him. And his strenghth left him(들릴라는 삼손을 자기 무릎에 누이고 잠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 삼손의 머리털 일곱가닥을 밀게한 후, 그를 건드리고 나서 힘이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블레셋(Philistines) 사람들에게 매수되어 삼손의 힘의 원천을 알아낸 후 이 그림에서와 같이 사랑을 나눈 직후 자신의 무릎에서 곯아 떨어진 그를 이발사를 불러 삼손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을 자르고 삼손을 감금하여 맹인으로 만들기 위한 체포조인 병사들이 막 들이닥치려는 찰나를 나타내고 있다. 루벤스는 8년간의 이탈리아 생활을 끝낸 후 네덜란드로 돌아와 이 그림을 니콜라스 로콕스라는 친구를 위해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이런 친구가 한명쯤 있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그림에 등장하는 들리라는 창녀로 묘사되고, 마치 창녀의 말로가 들릴라의 뒤에 있는 포주인 노파로 될 것을 암시하는 듯 포주 노파도 등장한다. 벽의 미켈란젤로의 비너스와 큐피트의 조각상...그리고 빛의 절묘한 조화...들릴라가 매수되어 받은 은화는 지금 돈으로 얼마나 될까? 갑자기 쓸데없는 궁금증이 인다. 그림의 인물은 실제 크기로 그려진 것이므로 이 그림의 크기는 알아서 짐작되리라 믿는다.

 

 

 

  

 <Room 30>-비너스의 욕실(록커비 비너스)(The Toilet of Venus ('The Rokeby Venus')), 1647-51년 제작, 벨라스케스(Diago Velázquez, 1599-1660)

    

 이 그림은 당시 스페인의 교회가 누드화를 그리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벨라스케스의 남아 있는 유일한 누드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비너스 그림이 록커비의 비너스라는 별칭을 가진 이유는 이 그림이 내셔날 갤러리에 들어오기 전에 영국 요크셔의 록커비 홀에 있는 모리트 미술관에 있었기 때문이다.  잘 아시다시피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여성의 아름다움의 표준으로 일컬어진다. 여기에서 그녀는 아들 큐비트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 통통한 큐피트가 들고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비너스. 사람들은 이 그림의 섬세한 묘사, 당시의 헤어 스타일, 잘록한 허리, 우뚝 솟은 둔부 등은 실제 모델을 써서 그렸을 것으로 여겨진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실제 광학적으로 물리학적인 측면으로 보면 전혀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화가가 그것을 몰랐을리는 없다. 아마도 그 화가는 거울 속에 자신의 눈으로 보는 비너스의 초상을 집어 넣고 싶어서 였을 것이다. 이 모델은 당시에 인정을 받아 잘 나가던 돈 많은 화가였던 벨라스케스의 정부라는 설이 있다.그래서 정면 얼굴보다는 '비춤'의 미학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Room 31>-찰스 1세의 기마 초상(Equestrian Portrait of Charles I), 1637-8년경 제작,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

     

이 그림은 아버지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의 뒤를 이어 1625년 부터 1649년까지 재임하다, 의회파에 의해 1649년 처형당한 찰스 1세의 초상화이다. 이 그림은 당시의 궁정 화가인 반 다이크가 그린 그림이다. 반 다이크는 1632년부터 궁정 화가가 되었으며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왕의 통치권을 표현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신으로 부여받은 통치권에 감히 의화파들이 물고 늘어졌으니 갈등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1642년 내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637년부터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림 속의 찰스 1세는 마치 기사들처럼 말에 올라타고 있으며, 말도 대단히 위용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풍경과 뒷부분의 헬멧도 의미 있게 들어가 있다. 반 다이크는 스튜어트 왕가의 초상화를 여러 점 남기고 있다.

 

 

 

 

 

 

 

 

 

  

<Room 32>-엠마오에서의 만찬(The Supper at Emmaus), 1601년 제작,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우리말 오디오 가이드 없음

 

이 그림은 성경의 이야기를 재현한 카라바조의 작품이다. Luke-Chapter 24 : 30-31. 30  When he was at the table with them, he took bread, give thanks, broke it and began to give it to them. 31 Then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and he disappeared from thier sight.(30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식사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순간, 예수님께서는 사라지셨습니다.) 성경의 내용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 중 두 사람 앞에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이 그림에서 테이블 끝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는 과일 바구니와 그 바구니 안의 과일들의 구도와 사실적인 묘사, 그리고 예수와 사도의 팔의 위치가 가져오는 시선의 집중 효과, 더불어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대조 효과 등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이 그림에서의 예수는 턱수염이 없는 몇 안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카라바조는 렘브란트 등에 강한 영향을 끼친 화가라고 알려져 있으며, 참고로 24호실에는 네덜란드의 소위 카라바조학파(Caravaggists)의 그림들을 관람할 수 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