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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ational Gallery - 다섯번째 이야기 - 18~20세기 초반의 회화

과천가이 2009. 12. 24. 22:06

18세기와 19세기 영국은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 박지향 교수(서울대)에 의하면 18세기는 긴 성숙의 시대요, 1815-1870년은 황금기의 시대요, 1870-1914년은 새로운 세계 강자들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조락하는 시대요, 1914년 이후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교차되는 시대로 정의하였다. 특히 영국의 역사에서 18-19세기는 정말 잘 나가던 시대였다. 18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의 유럽의 회화에 대해 알아보자.

 

<18세기~20세기의 초반의 회화(18TH-TO EARLY 20TH-CENTURY PAINTINGS)>

 

 카날레토, 고야, 터너, 컨스터블, 앵그르, 드가, 세잔, 모네, 반 고흐 

 

교회 및 궁전에 대한 위대한 회화가 계속해서 나왔으나, 소형 회화를 그려 미술품 매매상과 공공 전시회를 통해 전시 및 판매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19세기에는 공식적인 예술 시설에 대한 반감을 가진 독립 예술가들의 사상에 따라 예술 운동(유사한 스타일로 작업하는 예술가들의 연합)이 등장했습니다.

 Canaletto, Goya, Turner, Constable, Ingres, Degas, Cézanne, Monet, Van Gogh 

 

Although the production of grand paintings for churches and palaces continued, it became more common for artists to paint smaller works that were exhibited and sold through art dealers and public exhibitions.

In the 19th century, art movements (loose associations of artists working in a similar style) emerged, as did the idea of the independent artist who rebelled against the official art establishment.

 

18~20세기 초반 회화들이 배치된 방의 위치와 각 방의 주요 그림들은 다음과 같다.

 

   

 

 18세기 이후의 미술품들은 상대적으로 이전 시대보다 그림 그리기 편한 세상에서 나온 그림들이다. 합성 물감과 납작한 모양의 붓의 발명, 금속 튜브에 담긴 물감 등등의 발명은 화가들이 전원으로 나가 그림을 그리는데 중요한 도우미들로 등장한 시대이다. 18~20세기 초반의 그림이 전시된 갤러리의 각 방을 돌다보면 이전까지 그림들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색체나 묘한 분위기 그리고 붓터치의 느낌 등을 맛볼 수 있다. 내셔날 갤러리에서는 대체로 인상파의 그림에서 그 전시가 그치게 된다. 물론 이후의 그림들은 세인트 폴 성당과 밀레니엄 브릿지를 사이에 두고 있는 테이터 모던에 가면 만날 수 있다. 그래도 현대 미술에 가까운 작품들이라서 그런지 이쪽 지역의 그림들에, 특히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들에 사람이 제일 많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18~20세기 초반의 회화를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삼성전자가 후원하는 우리말 가이드와 내셜날 갤러리가 엄선한 하이라이트 30선을 중심으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일단 세인스베리관의 15세기 그림과 그리고 16세기 그림, 더 나아가 17세기 그림을 섭렵한 후에 Room 37를 통해 이쪽으로 건너왔다고 보고 그림을 보는 동선을 Room 38 --> Room 35 -->Room 34 -->Room 41 --> Room 43 --> Room 44 --> Room 45 의 순이다. 물론 그 사이의 룸을 보지 말라는 의미는 역시 절대 아니다.  

 

 

 <Room 38>-석공의 작업장(The Stonemason's Yard), 1727-8년 제작, 카날레토(Canaletto, 1697-1768)

    

석공의 작업장은 카날레토의 걸작 중의 하나이다. 베네치아 출신인 카날레토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당대의 유명한 풍경화가로 그의 그림은 거의 해외로 팔려 베네치아에는 별로 그의 작품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그림의 장면은 작업장의 작은 광장에서부터 대운하를 거쳐 성 마리아 교회에 이르기까지의 풍경을 담고 있다.  광장은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근처 교회를 수리하는데 필요한 임시 작업장이었다. Istrian stone 벽돌은 운하를 통해 작업장인 광장으로 운반되었다. 멀리 떨어진 돔형의 탑이 있는 성마리아 교회는 그림이 완성되고 난 후인 1744년에 무너졌다고 한다. 그 이후로 다시 지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교회는 영원히 그림 속에만 존재한다.  이 그림의 묘사나 장면들을 보면 이 그림은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외국 사람인 후원자보다는 베네치아 출신의 후원자를 위한 그림일 것으로 여겨진다. 

 

 

 

 

 

 

 

<Room 35>-앤드류씨 부부(Mr and Mrs Andrews), 1750년 제작, 게인스보로(Thomas Gainsborough, 1727-1788)

  

이 그림은 게인스보로의 초기 걸작품이다.  이 그림은 1748년 런던에서 그의 집인 서퍽(Suffolk)으로 돌아온 이후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 해 11월에 Robert Andrews와  Frances Carter의 결혼이 있었으며 이 그림은 일종의 결혼 기념 초상화인 것이다. 게인스보로는 당대의 초상화와 풍경화 부문에서 일인자였다. 딱딱하지 않고 약간 비스듬하게 서 있는 앤드류씨. 그의 팔 밑으로 그 당시의 여유로운 자들의 상징인 사냥 총이 있으며, 충직한 사냥개가 옆에 있다. 그의 부인은 로코코 풍의 나무 의자에 앉아있다. 부인의 무릎은 아직 미완인채로 남아 있다. 아마도 그 이후에 태어날 아이들을 더 그려넣기 위함일 것이다. 대개의 초상화가 그림의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 그림은 인물이 한쪽 켠으로 불러서있고, 많은 부분을 풍경이 차지하고 있다. 이 풍경은 결혼으로 말미암아 증식된 재산을 나타내고 있다. 어쩌면 대단한 과시욕일 수도 있다. 게인스보로는 당시에 그림의 쟝르로 인정 받지 못하던 풍경화를 초상화와 함께 등장시켜, 다시 말해 일종의 변증법적 통합을 시도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Room 34>-위슬재킷(Whistlejacket), 1762년 제작, 스텁스(George Stubbs, 1724-1806)

 

위슬재킷은 1749년에 아라비안 순종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경주용 말이다. 위슬재킷은 1759년 8월 요크에서 거행된 2000기니(기니는 현재 사용되지 않는 화폐 단위로 약 1.05파운드 가치가 있다고 함)가 걸린 4마일 경주에서 유명한 승리를 거둔다. 스텁스는 위슬재킷의 마주인 로킹엄(Rockingham)으로 부터 위슬재킷을 두 차레에 걸쳐 그려줄 것을 주문받고 1762년 경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 중 한 작품은 바로 이것이고 다른 한 작품은 다른 두 마리의 종마와 함께 있는 말 그림이다. 이 그림은 말 자체의 그림은 매우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남아 있으며, 그림의 크기도 실제 말의 크기인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그 배경은 단순하기 작이 없다. 후문에 따르면 조지 3세 국왕때의 수상인 로킹엄은 조지 3세의 초상화를 위해 말을 먼저 그리고 그 위에 조지 3세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는데 그만 조지 3세로부터 수상 해고 통지서를 받자 그만 두었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이야기는 계속 회자되고 있다. 여하튼 당시에 말의 해부학을 공부한 스포츠 회화의 대가인 스텁스의 위슬재킷의 그림은 34호실을 들어서면 관람객을 위압하기에는 충분하다.  

 

 

 

 

 

 

 

 

<Room 34>-건초 수레(The Hay Wain), 1821년 제작, 컨스터블(Constable, 1776-1837)

 

컨스터블의 그림은 스튜어 강(the River Stour) 가의 프랏포드에 위치한 서퍽(Suffork)지방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1824년 프랑스 살롱에 출품하여 금상을 받은 작품이다. 컨스터블은 그리 크게 서양 미술사에 주목을 받지 못하는 영국에서 그나마 몇 안되는 유명 작가 중의 하나이다. 말이 끄는 건초 수레가 여름 날의 냇가를 건너고 있는 조용한 전원을 나타낸 그림이다. 오른쪽 멀리 초지가 보이고 거기에서 건초를 만드는 농민들의 모습이 아련히 보이고 있다. 왼쪽의 오두막은 Willy Lott라는 소작 농부가 세를 얻은 것이고 프랏포드의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있다. 비록 이 그림은 서퍽의 풍경을 나타내고 있지만 작업은 런던의 화실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물론 이 그림은 컨스터블의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스케치에 바탕을 둔 그림이다. 아마도 부유한 아버지 농장의 풍경을 담고 있는 그림이기에 스케치가 언제나 자유로웠을 것이다.

 

 

 

 

 

  

 

 

<Room 34>-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 1839년 제작,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이발사의 아들 윌리엄 터너만큼 영국인의 사랑을 받는 영국 화가는 없으리라. 아마도 미술사에 영국인의 족적을 남길 수 있는 영국 출신 화가의 마지막이 터너일 것이다. 터너의 그림을 보면 정밀하게 묘사하거나 풍경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다은 그림과는 다른 느낌이다. 이후에 등장하는 인상파 화가들의 화풍에 강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전함 테메레르에 나타난 하늘 빛을 보면 터너는 색채 마술사의 반열에 올라도 전혀 손색이 없다. 어두운 붉은 하늘의 일몰과 구름이나 배의 색채 표현이 미술사에 큰 걸음을 하나 내딛은 화가이다. 전함 테메레르는 1805년의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의 승리를 이끈 98개의 대포가 실린 전함이다. 전함 테메레르는 1838년까지 현역에서 활동하다가 런던의 선박 해체업자에게 팔려 템즈강 상류의 로더라이드 부두로 예인되고 있다. 후문에 의하면 터너는 예인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예인되는 과정은 사실과는 다른 상상에 의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터너의 애국심의 발로이다. 이 그림은 사실에 대한 기록화가 아닌 위대했던 전함에 대한 회상과 지나간 영웅적 시대에 대한 찬가를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함 테메레르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전함의 퇴역은 증기선의 교체이자, 고전 시대가 거하고 산업 사회의 새로운 시대로의 변환점을 의미한다. 고전시대의 종점과 현대 사회로의 출발점에 서 있다고나 할까?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이는 터너를 제일 좋아하다고 한다.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여하튼 터너 이후에 영국은 세계 미술사에 아직 거장을 내고 있지 못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런던의 킹스턴 보로(Kingston Borough)에서 리치몬드 공원(Richmond Park)을 가로 질러 큐 가든 방향으로 가다보면 리치몬드 지역의 템즈강 상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view point가 하나 있다. 이 곳에 가면 터너가 1938년에 그린 'Richmond Terrace'라는 그림에 대한 소개와 그것을 금속판에 새겨 놓은 장소가 있다. 바로 이 자리에서 터너가 스케치 했다는 것을 안내하고 있다. 터너 그림의 금속판(많이 마모되기는 했지만 잘 들여다보면 가운데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과 실제 그 곳 사진을 보너스로 올려본다.

 

   

 

 

 

 

<Room 41>-므와테시에 부인(Madame Moitessier), 1856년 제작, 앵그로(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산림수로부(the department of forests and waterways) 공무원의 딸인 마리(Marie-Clotilde-Inès de Foucauld)는 1821년에 태어나 부유한 은행가인 므와테시에(Sigisbert Moitessier)와 1842년에 결혼하였다. 앵그로는 1844년 므와테시에로부터 초상화 의뢰를 받았을 때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므와테시에 부인을 보고 작업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당시 프랑스의 교양미 넘치는 아름다운 모델 부인과 품격높은 부유층의 생활상을 그림에 담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초상화는 므와테시에 부인의 나이 26에 시작하여 그녀의 나이 35살이 되던 해에 완성했다고 하니 참으로 긴 작업 기간이고, 더 놀라운 것은 이 그림을 완성했을 때의 앵그로의 나이는 76살이었다고 한다(그래도 1897년에 므와테시에 부인이 사망하기 전에 완성되었으니 다행인가?). 이 초상화는 고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의 영향을 받은 그림이다. 므와테시에 부인의 집게 손가락은 가볍게 머리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포즈는 고대 로마 도시인 헤르클라네움(Herculaneum)의 벽화에 나오는 여신의 포즈이기도 하다. 원래 앵그로는 므와테시에 부인의 딸을 부인과 함께 초상화에 담아 내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딸에게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게하는 것은 대단한 무리였으리라. 그리고 그림이 완성될 때 쯤에는 그녀의 딸은 너무나 성장해버렸다. 따라서 그 계획은 수정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엥그로는 초상화를 저급 예술 쟝르로 폄하했며 '역사화'와 '상징화'에 몰두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최고의 초상화가로 성공을 거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851년에 완성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서있는 또다른 초상화는 미국 워싱턴에 있는 National Gallery of Art에 있다고 한다.

 

 

 

 

 

<Room 43>-라 그르누예르(Bathers at La Grenouillère), 1869년 제작, 모네(Claude Oscar Monet, 1840-1926)

 

 

이 그림은 파리 서쪽 근교에 위치한 부지발(Bougival) 근처의 세느강변에 있는 보트도 타고 수영도 할 수 있는 유명한 '라 그르누예르'라는 유흥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869년 여름에 모네는 그의 정부인 카밀(Camille), 그리고 그의 아들과 함께 라 그르누예르에 살면서 르노와르와 함께 작업을 했다. 그림에는 대낮에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 방갈로, 대여용 보트와 작은 나뭇길 등이 묘사되어 있다. 모네는 그늘 속에 계류 중인 보트를 표현하는데 넓은 영역의 색을 사용하고 있으며, 반면에 강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좀더 밝은 점들로 그려넣고 있다. 그는 아마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이것보다 조금 큰 캔버스에 스케치를 했었을 것이다. 당시의 피사로, 르노와르, 드가 등과 함께 모네는 파리 살롱전에 반기를 들고 자신들의 그룹 전시를 갖는 화가 조합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파리에서 <인상, 일출>이라는 당시에는 스케치 정도의 엉성한 그림으로 평가 받은 작품의 이름으로 인해 인상파라 불리게 된다. 교통의 발달과 금속 튜브의 담을 수 있는 물감, 납작 붓의 발명은 모네와 같은 화가들이 교외에서 직접 작업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자연 일광의 효과을 포착하는 인상파 화가들의 과제를 수행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Room 44>-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Bathers at Asnières), 1884년 제작, 쇠라(Georges Seurat, 1859-1891)

 

 

이 그림은 쇠라가 거대한 캔버스에 그린 첫번째 작품이며, 점묘화법을 사용한 최초의 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리기까지 쇠라는 나름대로 색채이론과 광학 이론을 연구화면서 점묘화법을 발전시켰다. 쇠라의 이 작품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가 그린 프레스코 벽화나 고대 이집트 예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아스니에르(Asnières)는 파리의 북서쪽 세느 강  지류로 산업 지대이다. 이 작품은 일단의 젊은 노동자들이 강변에서 휴일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물에 서 있는 사람의 빨강 모자는 파렛트에서 색을 혼합하여 빨강색으로 나타낸 것이 아니라 망막의 기본 3색인 Red, Green, Blue에 대한 반응에 의해 색이 들어나도록 노란색과 푸른색의 점들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명암 대비도 절묘하여 그림 속의 사람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 다시말해 밝게 처리된 피부색 옆의 강물은 어둡게, 그림자 때문에 어두어진 피부 옆의 강물은 밝게 처리하여 그림 속의 인물들이 평면적 실체가 아닌 입체적 실체 속에서 드러나도록 하고 있다. 그림에서 흥미로운 것은 강물에 삼색기를 뒤에 걸고 배를 타고 가는 양산을 쓴 여인과 신사는 그랑드 자트 섬으로 향하고 있는데, 1885년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라는 걸작품의 배경이 바로 그 섬이다. 

 

 

 

 

 <Room 45>-해바라기(Sunflowers), 1888년 제작,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이 그림은 1888년 8월부터 9월 사이에 그린 해바라기 그림 4점 중의 하나이다. 반 고흐는 친자연적인 화가들의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프랑스 남부 아를로로 옮겼고 그 곳에서 이른바 세를 얻은 집인 Yellow House에 이들 그림들로 고갱의 방을 장식하려고 하였다. 그와 고갱는 1888년 10월에서 12월까지 이곳에서 함께 생활한다. 해바라기 연작 그림 4편을 꽃이 시들기 전에 완성하지만 그 가운데 두 작품이 고갱의 침실에 걸기에 훌륭하다고 판단하고 두 작품의 그림에 Vincent라는 서명을 한다. 그 두 작품 중의 한 작품이 바로 이것이며, 다른 한 작품은 현재 독일 뮌헨에 있다. 1889년 1월에 이것과 완전히 똑 같은 그림 세 편을 그리는데 그 중 하나가 네덜란드 고흐 미술관에서 소개한 바로 그 그림이다. 해바라기 그림은 소위 '빛을 배경으로 한 빛(light on light)'을 그리는 실험에 성공한 첫 작품이라고 한다. 노란색 바탕 배경에 해바라기 그림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속의 해바라기는 탄생과 성숙, 죽음에 이르는 생의 순환을 상징하고 있다. 시들어 가는 꽃을 표현하기 위해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그림을 그리는 임파스토(impasto) 기법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고, 뻣뻣한 씨나 꽃받침의 거친 질감을 표현하는데 기성 물감을 사용하고 있다. 화려한 붓터치와 마디지고 비틀린 줄기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비해 꽃병과 탁자는 매우 간략하게 표현되어 시선의 집중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런던 내셔날 갤러리의 45번 방은 언제나 고흐의 그림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다 이유가 있으리라.....

 

 

 

 

The End - the National Gallery in London

- 테이터 모던 미술관 소개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