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기독교의 출발은 어디에서부터 일까? 로마가 영국에서 물러간 후 앵글로 색슨 족들이 영국을 침탈하여 살고 있을 때 영국에 기독교가 전해졌고, 이 기독교가 영국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서기 601년 캔터베리에 대성당을 지으면서부터이다. 한 마디로 영국 기독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헨리 8세 때의 영국 성공회의 독립으로 캔터베리는 영국 성공회의 총 본산으로 거듭난다. 영국 기독교의 출발점 캔터베리에 2010년 7월 17일 다녀왔다. 캔터베리의 모습을 일단 대성당과 그리고 그 오래된 세월의 반증인 허물어져간 대성당 관련 건물의 사진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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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는 고대 영어인 Cantwareburh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그 뜻은 켄트 사람들의 근거지(Kent people's stronghold)라고 한다. 캔터베리는 영국 남동부의 켄트 주의 도시이다. 시내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캔터배리 대성당 쪽으로 걸어가면서 재미있게 생긴 집을 발견하였다. 1647년에 세워진 캔터배리의 중등학교인 King's School의 예날 학교 자리 근처의 Old King's School의 가게 건물로, 1층(Ground Floor)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1층 위에 1849년에 찰스 디킨스가 이 건물의 기울어짐에 대해 한 말씀하신 구절이 있으니 잘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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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걷다보면 아직도 중세 때의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그런 오래된 건물에는 아래 사진과 같은 붉은 딱지가 붙어 있다. 이런 중세의 건물 덕택에 캔터베리에서는 심심찮게 중세의 거리와 현대의 거리가 혼합된 모습을 곳곳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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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1503년부터 호텔의 기능을 해왔다는 건물을 만나게 된다. 500년의 역사를 가진 호텔.....드디어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왔다. 입구 광장에 서 있는 추모비는 1차와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장병들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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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캔터베리 대성당에 도착하였다. 켄트왕국이 597년 기독교로 개종한 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가 된다. 물론 오늘날에는 영국성공회의 최고위 성직자가 캔터베리 대주교이며, 캔터베리 대주교는 영국 성공회의 상징이다. 캔터베리 대성당은 로마의 베네딕트 수도원 원장이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레고리 교황의 명으로 597년 이곳으로와 초대 대주교가 되고, 602년에 이 성당이 창건되었다. 그 이후 여러 세월을 거치는 동안 대성당은 변화를 거쳤다. 캔터베리 대성당 입구와 대성당 일부의 모습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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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주변의 성당 구역(The Cathedral Precincts)에는 여러 부속 시설이 있었다. 성당 구역의 부속 시설 말고도 크리켓 선수로 유명한 4대 해리스 남작인 George Robert Canning Harris의 추모 공원이 있었다. 그의 크리켓 선수로서의 초상화는 런던의 내셔날 초상화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켄트에서 1932년 3월 24일 사망한 사람의 추모 공원도 여전히 공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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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성당의 유명세는 아마도 토머스 베겟 대주교의 암살 사건도 한 몫 할 것이다. 한참 왕권을 강화하던 헨리 2세(재위 기간 1154~1189년)는 어쩔 수 없이 로마를 중심으로 한 교회 권력과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해서 순종적인 대주교를 원한 헨리 2세는 자신의 친구 토마스 베겟을 대주교로 임명한다. 그러나 베겟은 사사건건 왕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은 1170년 베겟이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베겟이 살해되자 아직은 교황의 힘보다 약했던 헨리 2세는 맨발로 캔터베리까지 용서를 빌며 맨발의 탄원 길에 오르게 된다. 교황은 베겟을 성인으로 추앙하고, 그 이후 캔터베리 순교지로 많은 사람들이 순례로 찾아오면서 캔터베리는 번영하게 된다. 캔터베리로 순례를 오가면서 그 당시의 사회 상황을 이야기로 담아낸 것이 바로 그 유명한 14세기 영문학의 걸작이라는 제프리 초서(Jeoffrey Chaucer)의 '캔터베리 이야기(Canterbury Tales)'이다. 토마스 베겟은 시내의 Pub의 상호로도 자리 잡고 있었다. 토마스 베겟이라는 펍과 캔터베리의 High Street의 모습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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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왕권 강화와 교황으로부터의 독립은 헨리 8세에 이르러 실행하게 된다. 헨리 8세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를 창립하고 1538년 캔터베리의 모든 사원과 수도원을 폐쇄했다. 물론 베겟은 반역자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 이후 1642년에는 청교도들에 의해 다시 한번 성당은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현재의 성당은 그 이후에 수복된 고딕 양식이라고 한다. 물론 2차 세계 대전때도 폭격을 맞은 바 있고.... 매우 넓은 캔터베리 대성당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한번 올려본다.
캔터베리 시내는 오래된 성벽과 현대적 건물이 함께 어울어져 있는 모습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도 헨리 8세에 의해 파괴된 후 이렇게 정문만 온전하게 남아 있다. St Augustine's Abbey 정문의 모습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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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 Street를 따라 걸으면서 보았던 왕립 박물관은 열심히 보수 중이라서 당분간 입장은 불가하였다. 성 토마스인 베켓의 사후 기적을 믿고 캔터베리로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머물던 'The Canterbury Hospital of St. Thomas'라는 세월이 묻어난 건물도 그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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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스트리트의 건물 중 튜더 양식의 전형적인 건물로 하얀 벽과 검은 목재로 지어진 '직물사의 집(The Old Weaver's House)'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지금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이용되고 있는 이 직물사의 집은 1507년에 지어진 집으로 프랑스의 종교 박해를 피해 16세기와 17세기에 벨기에 북부의 플랑드로에서 온 벨기에 의 신교도와 프랑스 신교도인 위그노(Hugenot)의 직물사들이 이곳에서 직물을 짰고 그 당시의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가 이들에게 이곳에서 살도록 하였다. 직물사의 집의 캔터베리를 흐르는 Stour강을 끼고 있ㄷ가. 직물사의 집과 직물사의 집 옆을 흐르는 스타워 강의 모습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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