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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번째이야기-16일차(8월15일)- 하이델베르크 둘러보기

과천가이 2011. 1. 15. 22:18

라인강의 지류인 네카(Neckar)강변을 끼고 발달한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는 구교와 신교의 대립인 30년 전쟁의 진원지로 종교개혁의 선두주자인 루터파와 캘뱅파의 신학 논쟁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독일 낭만주의의 사상의 중심지로 많은 독일의 철학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학구적인 도시 하이델베르크. 황태자의 첫사랑 촬영지, 하이델베르크 성, 그리고 1386년 세워진 독일 최초의 대학인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있는 이곳을 1983년에 찾은 이후 27년만에 다시 찾게 되었다. 네카 강과 하이델베르크의 모습을 올려본다.

 

   

 

우리는 Iris 호텔을 나와 비스마르크 광장 주변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하우프트 거리(Hauftstrasse)를 따라 슬슬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하우프트 거리는 마침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아직 많지는 않았다. 하우프트 거리에서 첫번째 눈에 뜨인 것은 프리드리히바우(Friedrichsbau) 건물 앞의 해부학 정원(Anatomy Garden)으로 알려진 자그마한 광장에 서 있는 동상이었다. 이 동상은 실험실에서 자주 사용되는 분젠 버너와 관련된 독일의 화학자 로베르트 분젠(Robert Wilhelm von Bunzen)의 동상이었다. 사실 분젠이 유명한 것은 분광분석법의 개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1859년 물리학자 구스타프 키르히호프(Gustav Robert Kirchhoff)와 함께 각 원소는 고유한 파장을 갖는 빛을 방출한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이다. 분광분석법은 태양과 천체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며, 이를 통해 분젠은 세슘과 루비듐을 발견하였다. 분젠은 1811년 생인 분젠은 19살인 1830년 괴팅겐에서 화학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1839년 마르부르크(Marburg)대학, 1851년 브레슬라우(Breslau)대학을 거쳐 1852년에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옮겨 1899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하이델부르크 대학을 화학 분야의 명성을 쌓은 대학으로 만들었다. 최소한 과학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젠 버너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사실 분젠 버너를 개발하는데 실제로 그가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여하튼 하이델베르크의 거리에서 그의 동상을 보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거리 투어는 시작되었다. 분젠 동상이 서 있는 곳의 건물은 이전에 도미니카 수도원 자리로 1804년 칼 프리드리히 공작이 구입한 건물로 프리드리히바우(Friedrichsbau)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61~1864년 과학 연구소로 지어졌다. 이 건물에는 물리학과, 광물학과, 수학과, 공학과, 생리학과가 있었으며, 이 건물 3층 중앙에는 생리학, 광학, 전기학, 수학, 철학에 능통했던 헬름홀츠와 분젠과 함께 연구한 키르히호프의 가족들이 살았다. 지금은 하이델베르크 대학 심리학 연구소로 사용되고 있다. 하우프트 거리와 하이델베르크 대학 심리학 연구소 앞의 분젠 동상의 모습을 올려본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왼편에 박물관이 하나 보인다. 선제후 박물관(Kurpfälzisches Museum)이 보인다. 아우구스부르크에서도 알아보았듯이 1555년 체결된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은 각 지역 및 지역 주민의 종교를 그 지역을 다스리는 선제후가 선택하도록 규정하였다. 당시 독일은 여섯 개의 영토로 분할 통치되고 있었는데, 그 중 팔래틴(Palatinate) 공국을 다스리던 프리드리히 3세(Fredrik Ⅲ)가 독일의 칼빈 개혁주의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선제후가 무엇인지는 앞에서도 설명 했는데,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뽑는 제후는 모두 6명이 있었고, 바로 팔래틴 공국을 다스리는 프리드리히 3세도 선제후(選帝侯) 중 한 명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선제후 박물관은 바로 팔래틴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박물관은 원래 프랑스 망명객인 샤를 드 그라임베르크 백작인 1810년 부터 선제후의 연대기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화폐, 무기, 회화, 기타 역사 자료를 모아 박물관의 기초를 세웠다고 한다. 1879년에 하이델베르크 시는 개인 소장품을 구입하여 오늘날의 박물관의 기틀을 다졌다고 한다. 선제후 박물관의 거리쪽 모습과 문으로 들어간 안쪽의 모습을 올려본다.

 

   

 

안으로 들어가면 정원이 펼쳐지고 가벼운 차를 마실 수 있다. 오래된 나무로 만든 자전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발걸음을 옮겨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보습을 볼 수 있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1386년에 세워진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며, 신성로마제국 시대에 4번째로 세워진 대학이다. 이 대학의 정식 명칭은 Ruprecht-Karls-Universität 이다. 보통 줄여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이라고 부르지만 정식 대학이름에 들어간 루프레히트 칼스라는 이름은 이 대학을 설립한 선제후 루프레히트 1세의 이름을 넣은 것이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과 야스퍼스(Karl Jaspers),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막스 베버(Max Weber)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학문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대학이다. 물론 자연과학 분야에서 특출난 업적을 남겼으며 노벨 물리학상, 노벨 화학상,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졸업생과 교수, 방문학자 등이 30여명을 넘고있다. 구 대학 건물의 복도에 게시된 노벨상 수상자의 사진 중 생물 선생인 내 눈을 끄는 수상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1922년에 노벨상을 받은 오토 프리츠 마이어호프(Otto Fritz Meyerhof)였다. 나치 정권의 인종 차별에 의해 1935년에 강의 금지를 선고 받았던 그는 에너지 대사 중 해당작용의 주요한 반응 경로를 밝혀낸 학자이다. 하이델베르크 구대학의 건물과 광장 분수대의 모습 올려본다.

 

   

 

보너스로 하이델베르크 대학 광장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올려본다.

 

 

 

구 대학 건물은 현재 1층은 대학 박물관으로 되어 있고, 2층으로 올라가면 대학 강당을 들러볼 수 있다. 분수대 뒤편의 오른쪽 출입문으로 가니 문이 잠겨있고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그 내용은 입장을 원하면 뒷편으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원래 개방은 화요일~일요일(10시-16시)에 한다고 하는데 일요일에 경우는 건물 뒷편의 학생 감옥으로만 입장할 수 있다고 한다. 2층의 강당으로 들어가 괜히 하이델베르크 대학 강당에서 어쩌면 헤겔이 야스퍼스가 강의를 위해 서 있었을지도 모르는 강단에 한번 서보았다(세계적 석학도 아니면서....) 2층 강당의 모습과 강단에 서 있는 내 모습을 올려본다.

 

   

 

대학박물관에는 설립자 루프레히트1세의 재단 설립 증서나 당시 교황의 인가증, 14세기의 인체도 등등을 볼 수 있다. 그 중  눈에 뜨이는 것이 1907년 하이델베르크에서 9.5km 떨어진 마우어의 구덩이에서 발견했다는 하이델베르크인에 관련된 내용이다. 이들 고인류들께서 살았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으며, 이들은 인류의 조상 중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알려지고 있다. 박물관의 전시물의 모습을 올려본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독특하고도 재미있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학생 감옥(Studenten karzer)일 것이다. 1983년에 왔을 때도 이곳이 인상적이었다. 학생 감혹은 학교 생활에서 일탈할 학생들에 대한 대학 당국의 처벌권이 현실화 된 장소이다. 대학 당국은 학생들의 일탈 행동의 경중에 따라 최소 24시간에서 최대 4주까지 학생들을 감금했다고 한다. 물론 감금 중에도 할 것은 다했다고도 볼 수 있다. 처음 2일은 빵과 물 만을 먹을 수 있고, 그 이후에는 사식과 맥주도 주문해 먹을 수 있었다고 하니 나름대로 세련된 감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대학으로 통하는 문을 통해 강의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하니 나름대로 낭만적인 학생 감옥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현재 자리의 학생 감옥은 1712년에 옮겨왔으며, 1914년까지 실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감옥에 갇힌 학생들이 남긴 수많은 낙서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역시 학생들답게 감옥을 그랜드 호텔, 로얄 궁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생 감옥의 입구와 낙서로 장식된 감옥 벽면을 올련본다.

 

   

 

하이델베르크에는 유명한 교회가 3개 있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하이델베르크 대학 광장과 건물 근처에 있는 카톨릭 성당인 하이델베르크 예수회교회(Jesuitenkirche)이다. 예수회교회는 1712년에 세워지기 시작하였으며 1759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일단 지어졌으며, 1866~1872년 사이에 탑이 추가 되면서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교회의 역사는 사실 하이델베르크에서 제일 유명한 개신교 교회인 성령교회의 역사와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성령 교회를 개신교에게 내어주고 1700년대에 이 성당으로 카톨릭의 중심이 옮겨왔으니 말이다. 이 성당의 바깥쪽 모습과 흰색과 황금색으로 꾸며진 제대의 모습이 담긴 성당 내부의 모습을 올려본다.

 

   

 

예수회교회보다 먼저 세워진 성령교회(Heiliggeistkirche)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로 구시가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크트 광장(Marktplatz)에 서 있다. 성령교회가 최초로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239년이라고 하니 그 역사가 나름대로 길다. 1398년에 후기 고딕 양식으로 , 그 이후에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계속 증개축이 이루어졌으니 오늘날의 교회는 3번째 성전인 셈이다. 이 교회를 짓는데 약 1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며 1544년에 탑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성령교회는 과거 수세기 동안 파괴되지 않은 몇 안되는 건물 중의 하나이다. 지금의 건물은 1709년 9년 전쟁(팔츠 왕위 계승 전쟁-프랑스 루이 14세와 그 주변의 국가들의 대동맹국 간의 전쟁) 동안에 불에 탓으나 그 이후 재건되었다고 한다. 성령교회는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의 화살을 온 몸에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 이후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이 교회를 공유하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1706년에 칸막이를 하여 개신교와 카톨릭 교도들이 성령 교회를 함께 사용하였다. 그러나, 1720년 선제후 Karl III Philip은 성령교회를 카톨릭 교도들에게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개신교가 강했던 프러시아, 네델란드, 스웨덴의 압력으로 Karl III Philip은 다시 재 분할하여 카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이 교회를 사용하도록 했으며, 1936년 개신교와 카톨릭 사이의 분리벽은 제거되고 오늘날은 개신교만이 성령 교회를 사용하고 있다.

 

   

 

건물 외벽과 마르크트 광장(Marktplatz)의 분수대 쪽에서 바라본 성령 교회 외형의 모습을 올려본다.

 

   

 

성령 교회 옆에는 기사의 집(Haus zum Ritter)이 오래된 풍상을 이겨내고 아직도 서 있다. 기사의 집은 1592년에 세워진 건물로 현재는 레스토랑과 호텔로 이용되고 있다. 1688년의 왕위 계승 전쟁(the Palatine War of Succession)의 와중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건물이다. 기사의 집 모습을 올려본다.

 

   

 

마르크트 광장에는 바로크 풍의 헤라클레스 동상이 서 있으며 옛날에는 죄수들을 사형시키던 형장으로 사용되어 있다. 마르크트 광장에서의 무시무시한 형장의 모습은 이제는 찾아볼 수 없고 따사로운 햇쌀을 받으면서 점심과 음료를 즐길 수 있는 멋진 곳이다. 우리도 이 곳에서 점심을 해결하였다. 헬라클레스 분수대 뒷편의 건물은 1701년에 세워진 시청사가 아직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시청사의 모습과 헤라클레스 동상의 모습을 올려본다.

 

   

 

광장에서 맥주 한 잔과 점심을 해결하였다.

 

   

 

보너스로 마르크트 광장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올려본다.

 

 

 

마르크트 광장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발걸음을 하이델베르크 성쪽으로 옮겨 갔다. 시청사 뒷편으로 자그마한 광장인 코른광장(Kornmarkt)이 나온다. 코른광장에는 성모마리아 상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을 따라 언덕쪽으로 가면 하이델베르크 성이 있다. 하이델베르크 성에 올라가는 방법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과 약 10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코른광장의 모습과 케이블카 승강장의 모습을 올려본다.

 

   

 

케이블카 승강장 옆쪽으로 올라가면 하이델베르크 성을 걸어서 올라가는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편으로 가면 돌로 포장된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고 오른편으로 가면 315개의 계단을 따라 엘리자베스 문쪽(케이블카 하차 지점쪽)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우리는 올라가는 것은 돌로 포장된 경사로를 택하고 내려오는 길은 315개의 계단 길을 이용하기로 했다. 하이델베르크 성을 걸어서 올라가는 두 갈래 표지판의 모습과 두 갈래 길을 올려본다.

 

   

 

해발 80m의 높이 에 서 있는 하이델베르크 성은 고딕 양식부터 르네상스 양식까지 여러 건축 양식이 혼합된 성이다. 하이델베르크 성이 최초로 문헌에 등장한 것은 1214년 이라고 한다. 당시 루드비히 1세가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이 성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약 300여년에 걸쳐 이 성은 계속 증개축이 되었으며, 그 때문에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 등의 다양한 건축 양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1537년에 낙뢰에 의해 성의 상층부가 파괴되었으며 그 후 1650년 현재의 구조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1764년에 다시 낙뢰로 파괴되어 몇몇은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하이델베르크 성 중 프리드리히 궁의 모습을 올려본다. 프리드리히 궁은 고성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궁은 병사관과 부속 건물이 있고, 선제후들의 입상 조각이 늘어서 있고 무엇보다도 유명한 것은 바로 대형 와인통이 아닐까한다. 프리드리히 궁과 성에 설치된 해시계의 모습을 올려본다.

 

   

 

보너스로 하이델베르크 중앙 부의 광장의 모습을 올려본다.

 

 

 

프리드리히 궁 지하에 있는 대형 와인통을 보기 위해 지하로 들어가면 우선 자그마한 와인통이 하나 눈에 띈다. 이 작은 와인통고 그 규모가 상당하다. 그러나 진짜 큰 와인통은 조금 더 지나면 볼 수 있다. 칼 테오도오가 길이 8.5m, 높이 7m의 용량 22만 2천 L의 큰 술통을 만들고 그 위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고 한다. 술통의 이마에는 칼 테오도오의 약자가 새겨져 있으며 큰 와인통 앞에는 큰 와인통을 지키는 난쟁이 광대 페어케오가 있다. 입구의 비교적 작은(?) 와인통과 대형 와인통(Grosses Fass)의 모습을 올려본다.

 

   

 

하이델베르크 성 중에 가장 유명한 르네상스 건물은 오토하인리히궁(Ottheinrichsbau)이라고 할 수 있다. 오토하인리히가 종교 개혁을 도입하고 이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궁과 오토하인리히궁 사이의 광장에서는 매년 8월말에 연극제가 열린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오토하인리히궁에는 18, 19세기의 약방을 재현해 놓은 독일 약사 박물관(Deutsches Apotheken Museum)이 있어 한번쯤은 둘러볼만한 가치가 있다. 마치 우리나라 한약방의 모습과 유사한 것을 찾을 수도 있고, 각종 약 제조 장치들의 실험 기구들을 볼 수 있다. 약사 박물관의 입구와 그 내부 전시물 중의 하나를 올려본다. 

 

   

 

보너스로 약사 박물관에서 약을 내리기 위한 각종 장치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올려본다.

 

 

 

하이델베르크의 고성의 모습은 수많은 역사의 풍상을 겪은채로 폐허가 된 모습에서 그 진정성을 찾을 수도 있다. 론델(Rondell) 정원에서 고성의 모습과 하이델베르크 시내의 모습을 우리 두 눈에 담아낼 수 있었다.

 

   

 

보너스로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내려다 본 시내의 모습을 올려본다.

 

 

 

하이델베르크 성을 둘러본 후 우리는 315개의 계단이 있는 쪽으로 내려와 네카강을 건너 맞은 편에 있는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을 가기로 했다. 철학자의 길에 이르기 위해 알테 다리(Alte Brucke-옛 다리-old bridge)를 건넜다. 알테 다리는 1786~1788년에 걸쳐 칼 테오도르(Karl Theodor Brucke) 선제후가 만든 것으로 네카 강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라 한다. 이 다리가 건설되기 전 많은 목재 다리가 있었으나 홍수 등의 범람으로 자꾸만 유실되어 칼 테오도르는 돌(사암)로 된 다리를 만들게 된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목재 다리는 불에 타버렸으며, 이것을 새로 지은 것이다. 이 다리의 정식 명칭은 칼 테오도르 다리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냥 알테 다리라 부른다고 한다. 9개의 아치를 가진 알테 다리의 모습과 이 다리에 있는 마치 던전(dungeon)앞에나 있을 법한 하얀 쌍둥이 탑문의 모습을 올려본다.

 

   

 

이 다리 중간에는 양쪽에 이 다리를 만든 칼 테오도르의 동상과 지혜의 여신 아테네 여신상이 서 있다. 칼 테오도르 동상의 아래쪽에는  라인강(Rhine), 모젤강(Mosel), 네카강(Neckar), 도나우강(Donau)을 상징하는 신상들이 있다. 아테네 여신의 아래쪽에도 역시 농업, 상업을 관장하는 신상들이 있다.

 

   

 

다리를 건너기 전, 즉 네카강의 남쪽 편에 우리의 눈을 끄는 원숭이 동상(Brückenaffe)이 있다. 이 하이델베르크 다리 원숭이 동상은 1979년 조각가 Gernot Rumpf 교수가 제작한 것으로 거울을 들고 있는 원숭이의 모습이다. 원숭이 동상은 원래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오래된 그림에는 강의 북쪽 탑에 원숭이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689~1693년 사이의 왕위계승전쟁 중에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것을 1979년에 재현한 것으로 오늘날 알테 다리의 명물이 되고 있다. 다리에 원숭이를 세우는 것은 전설에 의하면 이 도시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한 의도 였다고 한다. 거울을 바라다 보면 겸손과 겸양의 자세가 생긱지 않을까? "부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원숭이가 들고 있는 거울을 만져보세요. 하이델베르크에 다시 오고 싶으세요? 그러면 원숭이의 손가락을 만져보세요. 아이를 많이 낳고 싶나요? 원숭이 앞의 쥐들을 만져보세요. 꼭 실현될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원숭이 동상과 다리에서 올려다본 강의 남쪽 편 즉, 하이델베르크 성의 모습을 올려본다.

 

   

 

알테 다리를 건너 하얀 3층짜리 건물 옆으로 좁은 오솔길이 있다. 물론 안내판이 잘 되어 있으므로 그 길을 잃어 버릴 염려는 없다. 왜냐면 입구에 Philosophenweg라는 안내판이 커다랗게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괴테가, 헤겔이, 야스퍼스가 걸었음직한 좁다란 오솔길(Schlangenweg)을 따라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갔다. 좁다란 오솔길의 모습을 올려본다.

 

   

 

좁은 오솔길을 약 15분 정도 올라가면 산 중턱의 평탄한 길인 철학자의 길이 나온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사색의 나래를 펼쳤을 것이다. 여행 중의 우리는 무엇을 사색했을까? 산책로에 있는 벤치에서 하이델베르크 전경을 내려다 보는 것도 무척 운치가 있다. 특히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매년 6월 첫째 토요일, 7월 둘째 토요일, 9월 첫째 토요일에 펼쳐지는 불꽃 놀이를 보고 싶다면 철학자의 길이 최적의 장소라고 한다. 철학자의 길 산책로의 모습과 철학자의 길에서 내려다 본 하이델베르크의 모습을 올려본다.

 

   

 

보너스로 철학자의 길에서 내려다 본 하이델베르크 시내의 모습을 올려본다.

 

 

 

하이델베르크에서의 대강의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프랑크푸르트로 향했다.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도중에 고속도로 변의 휴게 장소(간단한 화장실과 벤치, 그리고 돌 식탁 등이 있는)에서 가스 버너로 라면을 정말 맛있게 끓여 먹었다. 여행하는 동안 이 가스 버너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이다. 버너는 한국에서 들고 온 것이고, 가스는 영국의 옥스퍼드의 등산용품 가게에서 산 것이다. 라면 끓여먹는 장면을 한번 보너스로 올려본다.

 

   

(To Be Continued..)